조지프 라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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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프 라이언스는 1879년 타즈매니아에서 태어난 호주 정치인으로, 호주 역사상 총리, 주 총리, 재무 장관, 야당 대표를 모두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1909년 타즈매니아 의회에 입성하여 주 정부 각료를 거쳐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타즈매니아 주 총리를 지냈다. 1929년 연방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 제임스 스컬린 정부에서 우정총국장과 공공사업 및 철도 장관을 역임했다. 대공황 시기, 스컬린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노동당을 탈당하고,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을 창당하여 1931년, 1934년, 1937년 총선에서 승리, 세 번의 임기를 수행했다. 그는 "건전 재정" 원칙을 고수하며, 균형 예산과 부채 상환을 강조했다. 193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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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라이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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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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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각하 |
본명 | 조지프 알로이셔스 라이언스 |
출생일 | 1879년 9월 15일 |
출생지 | 스탠리, 태즈메이니아 식민지 |
사망일 | 1939년 4월 7일 |
사망지 |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주, 오스트레일리아 |
안장지 | 머지 베일 기념 공원, 쿼이바 |
사망 원인 | 심장 마비 |
배우자 | 에니드 버넬 (1917년 결혼) |
자녀 | 12명; 케빈과 브렌던 포함 |
친척 | 리비 라이언스 (손녀), 케빈 라이언스 주니어 (손자) |
직업 | 교사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노동당 (1931년까지) 무소속 (1931년) UAP (1931년 이후) |
교육 | 호바트 사범대학 |
수상 재임 | |
직위 | 제10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
군주 |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
총독 | 아이작 아이작스 경 고우리의 얼 호어루스번 경 |
부총리 | 존 라담 얼 페이지 |
임기 시작 | 1932년 1월 6일 |
임기 종료 | 1939년 4월 7일 |
이전 | 제임스 스컬린 |
이후 | 얼 페이지 |
야당 대표 재임 | |
직위 | 야당 대표 |
총리 | 제임스 스컬린 |
부대표 | 존 라담 |
임기 시작 | 1931년 5월 7일 |
임기 종료 | 1932년 1월 6일 |
이전 | 존 라담 |
이후 | 제임스 스컬린 |
태즈메이니아 주지사 재임 | |
직위 | 제26대 태즈메이니아 주지사 |
총독 | 제임스 오그래디 경 |
임기 시작 | 1923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 1928년 6월 15일 |
이전 | 월터 리 경 |
이후 | 존 맥피 경 |
정당 대표직 | |
직위 | 연합 오스트레일리아당 대표 선거: 1931년, 1934년, 1937년 |
부대표 | 존 라담 로버트 멘지스 |
임기 시작 | 1931년 5월 7일 |
임기 종료 | 1939년 4월 7일 |
이전 | 신설 직위 |
이후 | 로버트 멘지스 |
직위 | 노동당 태즈메이니아 대표 선거: 1919년, 1922년, 1925년, 1928년 |
임기 시작 | 1916년 11월 2일 |
임기 종료 | 1929년 9월 16일 |
이전 | 존 얼 |
이후 | 앨버트 오길비 |
연방 내각 직책 | |
직위 | 재무장관 |
총리 | 본인 |
임기 시작 | 1932년 1월 6일 |
임기 종료 | 1935년 10월 2일 |
이전 | 테드 시어도어 |
이후 | 리처드 케이시 |
직위 | 상무부 장관 |
총리 | 본인 |
임기 시작 | 1932년 1월 6일 |
임기 종료 | 1935년 10월 2일 |
이전 | 찰스 호커 |
이후 | 프레더릭 스튜어트 |
직위 | 우정장관 |
총리 | 제임스 스컬린 |
임기 시작 | 1929년 10월 22일 |
임기 종료 | 1931년 2월 4일 |
이전 | 윌리엄 깁슨 |
이후 | 앨버트 그린 |
직위 | 공공사업 및 철도부 장관 |
총리 | 제임스 스컬린 |
임기 시작 | 1929년 10월 22일 |
임기 종료 | 1931년 2월 4일 |
이전 | 윌리엄 깁슨 |
이후 | 앨버트 그린 |
주 내각 직책 | |
직위 | 태즈메이니아 재무장관 |
주지사 | 본인 |
임기 시작 | 1923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 1928년 6월 15일 |
이전 | 월터 리 |
이후 | 존 맥피 |
임기 시작 | 1914년 4월 6일 |
임기 종료 | 1916년 4월 15일 |
주지사 | 존 얼 |
이전 | 허버트 페인 |
이후 | 엘리엇 루이스 |
직위 | 교육부 장관 |
임기 시작 | 1914년 4월 6일 |
임기 종료 | 1916년 4월 15일 |
주지사 | 존 얼 |
이전 | 앨버트 솔로몬 |
이후 | 월터 리 |
선거구 | |
직위 | 오스트레일리아 하원 의원 |
선거구 | 윌모트 |
임기 시작 | 1929년 10월 12일 |
임기 종료 | 1939년 4월 7일 |
이전 | 르웰린 앳킨슨 |
이후 | 랜슬롯 스퍼 |
직위 | 태즈메이니아 하원 의원 |
선거구 | 윌모트 |
의회 | 태즈메이니아 |
임기 시작 | 1909년 4월 30일 |
임기 종료 | 1929년 9월 13일 |
이전 | 새 선거구 |
이후 | 윌리엄 슈브리지 |
2. 초기 생애
조지프 라이언스는 1879년 9월 15일 태즈메이니아주 스탠리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1]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태즈메이니아주 주지사를 지냈으며, 1932년 총리로 취임하여 1939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조지프 라이언스는 1879년 9월 15일 태즈메이니아주 스탠리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엘렌(결혼 전 성은 캐럴)과 마이클 헨리 라이언스이며, 여덟 자녀 중 다섯째였다.[1] 그의 어머니는 킬데어주 출신으로 1857년 열한 살 때 호주에 도착했고,[2] 아버지는 골웨이주 출신 이민자의 자녀로 태즈메이니아에서 태어났다.[3] 라이언스는 호주에서 태어난 부모를 둔 최초의 총리였다.[1]그의 외조부 마이클 라이언스(고령)는 1843년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태즈메이니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계약 노동자였지만 계약 기간을 마친 후 소작농이 되었고,[4] 결국 태즈메이니아 북서부 해안 스탠리에 있는 땅을 살 만큼 돈을 모았다. 그는 영리한 사업가로 명성이 높았고, 자주 토지를 사고팔았으며 한때 호텔업에도 손을 댔다.[5] 그의 아들들은 그를 따라 농업에 종사했고, 라이언스 가족은 작은 지역 사회에서 유명했다.[6]
2. 2. 유년 시절
라이언스는 네 살 때, 그의 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스탠리에서 울버스톤으로 이사해 제빵소 겸 정육점을 열었다.[1] 1887년, 아버지의 멜버른컵 도박으로 가산이 탕진되어 빈곤에 빠졌다.[2]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비숙련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라이언스와 그의 큰 아이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라이언스는 아홉 살 때 인쇄소 심부름꾼으로, 열두 살 때에는 현지 농부들을 위해 "덤불 베기"(토지 개간)를 했다.[3] 1885년 울버스톤 주립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1887년에는 지역 가톨릭 학교로 전학했다.[4] 어린 시절 학업은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되거나 불규칙했지만, 당시 작은 시골 학교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1891년, 스탠리로 돌아와 숙모인 에티와 메리 캐롤과 함께 살며 스탠리 주립학교에 입학했다.[5]2. 3. 교사 경력
1895년, 15세의 라이언스는 모니터제하에 수습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는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급여를 받는 동시에 자신의 교육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고, 결국 정규 교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1] 아이리시타운에서 3개월간 대체 교사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1901년 초 동부 해안의 아프슬론과 앱슬리 메도우스의 두 개의 작은 "반일제" 학교를 맡게 될 때까지 스탠리에 남아 있었다.[1] 그 기간 동안 그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총리였던 윌리엄 라인의 가족 소유지인 "앱슬리 하우스"에 거주했다. 1902년 3월, 라이언스는 미들랜드로 전근하여 코나라와 르웰린의 학교들을 맡았다.[1] 그는 1905년 7월 다시 툴라로, 그 몇 달 후에는 스미스톤으로, 그리고 1906년 4월에는 파이오니어로 전근했다.[1] 1907년, 라이언스는 새로 문을 연 호바트 교사대학에 다니기 위해 1년 동안 호바트로 이주했다.[1] 그 후 그는 론세스톤으로 발령받아 글렌 두와 웰링턴 스퀘어 주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퍼스에서 잠시 교장직을 대행하기도 했다.[1] 그는 여러 차례 교육부와 갈등을 빚었는데,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해 자주 불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상관들 또한 그의 정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러한 불만과 정치 활동은 그의 잦은 전근과 원하는 보직을 얻지 못한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1]3. 주 정치
1879년 9월 15일 태어났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태즈메이니아주 주지사를 지냈다. 연합오스트레일리아당이 1931년 총선에서 승리하자 1932년 1월 6일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로 재임중이던 1939년 4월 7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09년 주 선거에서 타즈매니아 의회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12년에 재선되었지만, 선거 운동 중 채찍으로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
1914년, 존 얼 노동당 정부에서 재무장관, 교육장관, 철도장관을 역임했다.[3] 경제 문제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여 린드허스트 기블린 등에게 자문을 구했다.[4] 취임 초기, 정부는 가뭄, 산불,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노동당은 소수 정부였기 때문에 많은 입법 시도가 좌절되기도 했다.[4] 1916년 주 선거에서 노동당은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중 징병 문제로 1916년 노동당이 분열되었을 때, 라이언스는 징병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노동당에 남았고, 타즈매니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3]
3. 1. 정계 입문
라이언스는 호주 노동당에 동조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스미스턴에서 노동자 정치 연맹 지부 설립을 도왔으나, 공무원의 정치 활동 제한으로 당원직을 사퇴해야 했다.[2] 1908년까지 그는 자유 시간의 대부분을 노동당 선거 운동에 쏟았고, 뛰어난 연설가로 명성을 얻었다.[2]1909년 주 선거에서 라이언스는 윌못 선거구에서 6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출마하여 타즈매니아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2] 이로 인해 그는 교육부를 사임하고 교직을 포기해야 했으며, 연봉이 125GBP에서 100GBP로 줄었다.[2]
3. 2. 주 정부 각료
라이언스는 1914년 존 얼 노동당 정부에서 재무장관, 교육장관, 철도장관을 역임했다.[4] 그는 경제 문제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전문가의 자문에 의존했다.[4]3. 3. 태즈메이니아 주총리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태즈메이니아주 주총리를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온건하고 실용적인 정책을 펼쳐 기업 및 연방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태즈메이니아 입법평의회(상원)의 권한과 관련된 헌법 위기를 해결하였다.4. 연방 정치
라이언스는 1929년 연방 총선에서 노동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연방 정치에 입문했다. 제임스 스컬린 정부에서 우정총국장, 공공사업 및 철도 장관을 역임했다.[5] 1930년 대공황 시기, 라이언스는 정통 재정 및 디플레이션 정책을 옹호했으며, 재무장관 대행을 맡아 균형 예산 유지와 공공 지출 및 봉급 삭감을 주장하는 회복 계획을 발표했다.[3]
라이언스의 보수적 경제 접근은 기업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노동당 내에서는 재정 적자 확대와 지출 삭감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라이언스는 1931년 노동당을 탈당하고,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UAP)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3][5]
4. 1. 연방 의회 진출
1929년 연방 총선에서 라이언스는 주 의석과 같은 지역을 포함하는 윌모트(Wilmot) 연방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임스 스컬린이 이끄는 노동당의 압승 속에 당선되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우정총국장 겸 공공사업 및 철도 장관에 임명되었다.[5]1930년 대공황이 닥치자 스컬린 정부는 대응 방식을 놓고 분열되었다. 라이언스는 정부 내에서 정통 재정 및 디플레이션 경제 정책의 주요 옹호자였으며, 재무장관 테드 시어도어(Ted Theodore)의 인플레이션적이고 초기 케인스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시어도어는 1930년 6월 부패 혐의로 사임하게 되었고, 스컬린은 총리직과 더불어 재무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스컬린이 영국에서 제국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라이언스는 1930년 8월부터 1931년 1월까지 재무장관 대행을 역임했다. 라이언스는 1930년 10월에 균형 예산 유지와 공공 지출 및 봉급 삭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저금리와 산업에 대한 더 많은 신용 제공을 권고하는 회복 계획을 발표했다.[3]
그의 보수적인 경제적 접근 방식은 기업들로부터 지지를 얻었지만,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재정 적자를 확대하고 봉급 및 정부 지출 삭감에 격렬히 반대하는 많은 노동당 의원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의 공격에 소외된 라이언스는 멜버른 주요 인사들을 포함한 새로운 기업 후원자 그룹의 제안, 즉 정부를 떠나 보수 야당의 지도자직을 맡으라는 제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3][5]
4. 2. 노동당 탈당 및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 창당
라이언스는 대공황에 대한 대응 방식을 놓고 제임스 스컬린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31년 노동당을 탈당하여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UAP)을 창당하고 당수에 취임하였다.[3]5. 총리
1931년 오스트레일리아 총선에서 연합오스트레일리아당이 승리하자 1932년 1월 6일 총리에 취임했다.[1] 총리 재임 중이던 1939년 4월 7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1]
5. 1. 선거 및 정부 구성
Joseph Lyons영어와 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UAP)은 1931년 연방 선거에서 제임스 스컬린의 경제 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안정적인 재정 정책을 제시했다. 노동당이 공식 당과 랭파(Langites)로 분열된 반면, 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은 계급 갈등보다 국가 통합을 우선시하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 결과 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은 하원에서 34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노동당 양 파벌의 의석을 합쳐도 18석에 불과했다.[8]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은 초기에는 얼 페이지 경이 이끄는 국가당(Country Party)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지 않았다. 두 당은 하원 선거 운동을 따로 진행했지만, 상원 선거에서는 공동 후보를 냈다. 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은 과반수에 4석이 부족했지만, 남호주 비상위원회(Emergency Committee of South Australia)에서 선출된 5명의 국회의원이 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에 합류하여 2석 차이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Joseph Lyons영어는 국가당을 정부에 참여시키려 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단독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9] 새 정부는 1932년 1월에 출범했다. 라이언스는 빌리 휴스, 조지프 쿡에 이어 연방 또는 주 노동당 지도자 출신으로 비노동당 총리가 된 세 번째 인물이었다.
1934년 선거에서 통합오스트레일리아당이 8석을 잃자, 라이언스는 국가당을 연립 정부에 참여시켜 얼 페이지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1937년 선거에서 정부는 74석 중 44석, 양당 선호 득표율 50.6%를 얻어 존 커틴이 이끄는 재결합된 노동당을 꺾고 3번째 임기를 확보했다.[8]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라이언스는 라디오, 영화, 항공 여행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기자 회견을 자주 열고 기자, 편집자, 신문 소유주에게 직접 브리핑하여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했다.[3]
5. 2. 국내 정책
라이언스는 "건전 재정" 원칙을 고수하며 인플레이션과 정부 부채에 반대하고 균형 예산과 질서 있는 대출 상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 그는 7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라이언스는 호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노동당 출신이 아닌 총리로서는 처음이었다.라이언스 정부의 경기 회복 계획은 총리 계획을 재탕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호주 파운드의 평가 절하, 공무원 임금 삭감, 관세 인하, 재정 적자 감소, 그리고 일자리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증가를 요구했다. 1932년 첫 예산은 모성 수당을 제한하고, 연금을 삭감하고, 공무원 임금을 삭감했다. 두 번째 예산은 임금 삭감을 철회하고 감세를 제안했으며, 이는 1934년 예산에서 추가 감세로 이어졌다. 어떤 기준으로는 호주가 다른 유사한 국가들보다 대공황에서 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정부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어왔다.
1933년 4월, 서호주는 압도적으로 분리 독립을 투표했다. 라이언스는 2주 동안 '반대' 투표를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다. 연방 정부는 분리 독립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하고 서호주가 연방을 탈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서호주가 영국 정부에 개입을 요청한 것도 실패했다. 1933년 7월, 라이언스는 주에 대한 연방 정부 보조금 배분에 대한 공정한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연방 보조금 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이 위원회는 현재까지 존재한다.
라이언스 정부의 다른 입법적 업적에는 1932년 호주 방송 위원회(ABC)의 설립과 ''1936년 소득세 평가법''이 포함된다. 정부의 획기적인 국민 보험 계획은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고 결코 제정되지 않았다. 정치적 논쟁에는 1934년 에곤 키슈 사건과 1938년 달프람 분쟁이 포함된다. 1937년에는 항공과 농산물 마케팅에 관한 두 건의 동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11][12]
5. 3. 외교 정책
라이언스는 국제 관계나 외교 분야 경험은 부족했지만, 총리로서 외교 정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정부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3] 그의 정부는 "유화와 재무장" 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몇 년 동안 호주의 국방 예산을 늘려, 대공황 기간 동안 심각한 자금 삭감 이후 군대를 재건했다.[13] 라이언스는 평화주의적 성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주로 이탈리아와 일본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들 국가와 다른 주요 강대국 간의 전쟁이 호주가 의존하는 중요한 무역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영국-이탈리아 관계와 영국-일본 관계에 우려를 표하며, "호주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영국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13]1930년대에 호주 이익이 항상 영국 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라이언스는 세 가지 "태평양 구상"을 승인했다.
- 첫째는 1934년 부총리 존 레이섬이 이끈 호주 동방 사절단으로, 7개 아시아 국가를 방문했다.
- 둘째는 1935년 중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일본, 미국에 호주 정부 대표를 임명한 것이다.
- 셋째는 라이언스의 "태평양 협정" 제안으로, 태평양 주요 강대국 간의 불가침 조약을 구상했다. 1937년 제국 회의에서 이 협정을 지지했지만,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13]
라이언스는 1936년 에드워드 8세 퇴위 사건 당시 총리였다. 라이언스는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 제안에 강하게 반대했고, 내각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국왕에게 퇴위하지 말라고 전보를 보냈고, 사건 이후 국회에서 국왕의 결정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연설을 했다.[13]
5. 4. 은퇴 계획
1938년, 라이언스는 데번포트에 있는 자신의 집을 개조하고, 어린 자녀들을 캔버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현지 학교에 다니게 하는 등 구체적인 은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1] 부인에 따르면, 라이언스 부부는 사망 2주 전에 그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고, 가능한 한 빨리 은퇴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UAP) 관계자들은 적절한 후계자가 발견될 때까지 그가 계속 직을 맡아 줄 것을 거듭 압력을 가했다.[2]6. 사망
1939년 4월 5일, 라이언스는 멜버른에서 시드니로 가는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뉴사우스웨일스주 걸번에 있는 세인트 패트릭 칼리지에서 아들 케빈을 데려오던 중에 발생했으며, 위독한 상태로 세인트 빈센트 병원, 달링허스트로 긴급히 후송되었다.[14] 다음 날에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의식을 잃었다 깨었다 했다. 곧 혼수상태에 빠졌고, 성금요일인 4월 7일 아침에 사망했다.[14]
라이언스의 시신은 4월 10일(부활절 월요일)까지 시드니 성 메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다음 날 추도 미사가 거행되었고, 그 후 관을 옮긴 행렬이 대성당에서 서큘러 키까지 이어졌다. 라이언스의 시신은 HMAS ''벤데타''를 타고 그의 고향인 데번포트로 이송되었다. 4월 13일 루르드 성모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성당 부지에 매장되었다. 1969년 새로운 머시 베일 추모공원으로 이장되었고, 1981년 그의 부인도 함께 안장되었다.[14]
라이언스는 재임 중 사망한 최초의 호주 총리였다. 후임자를 지명하는 헌법적 선례가 없었고, 연합오스트레일리아당에 부당수가 없었던 상황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라이언스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얼 페이지—국민당 당수이자 사실상 부총리—가 내각 회의를 소집했고, 연합오스트레일리아당이 새 당수를 선출하는 동안 그가 임시로 총리를 역임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라이언스 사망 몇 시간 후 고리 경 총독에 의해 취임 선서를 했다. 1939년 연합 오스트레일리아당 당수 선거는 4월 18일에 열렸고 로버트 멘지스가 승리하여 4월 26일 페이지를 대신하여 총리가 되었다. 로리 피츠하딘지에 따르면 라이언스의 죽음은 "[연합오스트레일리아당의] 구성원들을 분열시킨 잠재된 적대감과 간신히 억눌린 경쟁심을 억제하던 유일한 힘을 제거했다"고 한다.[14]
7. 개인사
라이언스는 1915년 4월 28일 가족 친구의 딸인 에니드 버넬과 결혼했다. 에니드 버넬은 라이언스보다 거의 18살 어렸다.[15] 그는 1912년, 그녀가 15살 때부터 구애를 시작했다.[15] 부부는 슬하에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사망 |
---|---|
제럴드 데스몬드 | 1916–2000 |
셰일라 메리 노르마 | 1918–2000 |
에니드 베로니카 | 1919–1988 |
캐슬린 패트리샤 | 1920–2012 |
모이라 로즈 | 1922–1991 |
케빈 오차드 | 1923–2000 |
가넷 필립 버넬 | 1924–1925 |
브렌던 얼로이시우스 | 1927–2010 |
배리 조셉 | 1928–2015 |
로즈메리 조세핀 | 1929–1999 |
피터 줄리안 | 1931–2021 |
재니스 메리 | 1933–2020 |
에니드 베로니카는 육군 장교 모리스 오스틴과 결혼했다. 라이언스 사후, 그의 미망인 에니드도 정계에 입문하여 호주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전후 멘지스 정부에서 내각에 참여했다.[15] 그들의 아들 케빈과 브렌던은 타즈메이니아 정계에 입문하여 아버지 사후 수십 년 만에 주 정부 장관이 되었다.[16]
라이언스는 결혼 전 1902년경 코나라에서 교사로 근무할 당시 만난 펄 "피브" 베일리와 잠시 약혼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그들은 끈끈한 친구로 남았으며, 베일리는 결혼하지 않고 그들이 주고받은 연애 편지를 평생 간직했다.[15]
2018년, 전 총리 빌리 휴즈의 증손녀와 결혼한 짐 스타키가 라이언스의 증손자라고 주장했다.[19] 그러나 이 주장은 라이언스 가족과 라이언스 전기 작가인 앤 헨더슨에 의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20]
8. 유산
라이언스는 총리직을 역임한 사람들 중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널리 퍼진 슬픔을 야기했다.[21] 그의 온화하고 느긋한 외모는 종종 만화에서 졸리는 코알라로 묘사되게 만들었다.[3]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스컬린에 이어 두 번째 가톨릭 총리였으며, 토니 애벗까지 노동당이 아닌 가톨릭 총리는 유일했다.
라이언스는 호주 역사상 총리, 주총리, 재무장관, 그리고 연방 의회와 주 의회 모두에서 야당 대표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비록 조지 리드가 연방 성립 이전 식민지의 주총리였지만). 라이언스는 또한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유일한 총리이다. 그는 사망 당시 휴즈에 이어 호주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랫동안 총리직을 역임했다.
9. 서훈
라이온스는 1932년 6월 영국 국왕 측근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호주 총리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영예였다.[22] 1935년 3월 런던을 방문했을 때 공식적으로 측근회의에 선서했다. 1936년 생일 서훈에서 명예 동반자 훈장(CH)을 받았는데, 이는 에드워드 8세가 퇴위 전 수여한 4개의 훈장 중 하나였다.[23]
10.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29년 선거 | 하원의원 (윌모트 선거구) | 12대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52.9% | 10,697표 | 1위 | ![]() |
1931년 선거 | 하원의원 (윌모트 선거구) | 13대 |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 | 60.2% | 12,622표 | 1위 | |
1934년 선거 | 하원의원 (윌모트 선거구) | 14대 |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 | 57.5% | 12,924표 | 1위 | |
1937년 선거 | 하원의원 (윌모트 선거구) | 15대 |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 | 53.2% | 12,365표 | 1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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